세상을 보는 저의 생각을 전합니다.

Mo. 010-2393-5709

Tel. 031-713-4803
kakao ID. eomtank
E-mail. 

eomtank@gmail.coom

shawn@QuriusIP.com


Addr. Seongnam, Korea

세상을 바꾼 발명가들 ① 반도체의 아버지 강대원 박사

엄정한
2026-08-08
조회수 203

세상을 바꾼 발명가들 ① 반도체의 아버지 강대원 박사 (미국특허 제3,102,230호)


c38e389f196a6.jpeg


오늘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 노트북, 자동차, 그리고 AI 데이터센터의 GPU까지. 그 안의 수백억 개 스위치는 모두 60여 년 전 한 한국인 청년이 만든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30bb3e6a2408c.jpeg


안녕하세요. 큐리어스특허법률사무소의 엄정한 변리사입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를 졸업했습니다. 학부 시절 실험실에서 가장 익숙했던 장면 중 하나가 관로(furnace) 앞에 서서 온도와 시간을 맞추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강대원 박사님의 특허 명세서를 처음 정독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장은 화려한 청구항이 아니라 이 한 줄이었습니다.


“웨이퍼를 1200℃의 수증기 분위기에서 120분간 가열하여 실리콘 이산화물 막을 성장시켰다.”


화학공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얼마나 지독하게 구체적인지 압니다. 온도, 분위기 가스, 시간. 이 세 가지 변수를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웨이퍼가 깨졌을지, 얼마나 많은 밤이 지나갔을지가 문장 사이에 눌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두께 1000옹스트롬(0.0001mm)의 산화막이었습니다. 인류가 만든 가장 얇고, 가장 값진 절연층입니다.


1931년 경성에서 태어난 소년


강대원(姜大元, Dawon Kahng) 박사는 1931년 5월 4일, 일제강점기의 경성(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 때 열네 살,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나라에서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1955년 학사 학위를 받자마자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관악의 후배로서, 저는 이 대목에서 잠시 멈추게 됩니다. 1955년의 한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한다는 것, 그리고 태평양을 건넌다는 것이 어떤 결심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치고, 1959년 졸업과 동시에 당시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이었던 벨전화연구소(Bell Telephone Laboratories)에 입사합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습니다.


30년 동안 아무도 못 풀던 문제


당시 반도체 학계에는 오래된 숙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1925년 물리학자 릴리엔펠트가 “전기장으로 반도체의 전류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전계효과(field effect) 개념을 특허로 제시했지만, 30년이 넘도록 아무도 실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210b9a26a723a.jpeg

범인은 표면 준위(surface states)였습니다. 실리콘 표면에는 전자를 붙잡아 가두는 트랩이 빽빽하게 존재해서, 아무리 전기장을 걸어도 그 전기장이 안쪽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서 소모되어 버렸습니다. 이론은 완벽했지만 표면이 이론을 배신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문제에 매달리던 사람이 이집트 출신의 선임 연구원 모하메드(마틴) 아탈라였습니다. 그는 깨끗한 실리콘 위에 아주 얇고 질 좋은 열산화막을 키우면 표면 준위를 중화할 수 있다고 보았고, 1957년 사내 메모와 1958년 전기화학회 발표를 통해 이 표면 패시베이션 기술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1959년, 갓 입사한 한국인 박사에게 이 소자를 실제로 만드는 일이 맡겨집니다. 아탈라는 이미 조직 내 지위가 있었고, 관심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바이폴라 트랜지스터(BJT)의 성능 개선 쪽에 더 가 있었습니다. 손에 흙을 묻히는 일, 즉 확산·에칭·산화·증착을 반복하는 실무는 강대원의 몫이었습니다.


1959년 11월. 두 사람은 세계 최초로 동작하는 MOSFET(금속-산화막-반도체 전계효과 트랜지스터)을 만들어냅니다. 릴리엔펠트의 구상으로부터 34년, 강대원 박사가 벨 연구소에 출근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변리사의 눈으로 다시 읽는 그 특허


여기서부터가 제가 이 글을 쓰고 싶었던 진짜 이유입니다. 이 발명이 어떻게 특허로 만들어졌는가는, 실무를 하는 변리사에게 놀라울 만큼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벨 연구소는 이 발명을 두 건으로 쪼개어 출원했습니다.

구분

아탈라 출원

강대원 출원

출원번호

Ser. No. 13,688

Ser. No. 32,801

출원일

1960. 3. 8.

1960. 5. 31.

등록

US 3,206,670 (1965. 9. 14.)

US 3,102,230 (1963. 8. 27.)

청구 대상

유전체 피복 반도체 소자

그 소자를 이용한 회로 구성


강대원 박사의 명세서 서두에는 “그러한 소자는 1960년 3월 8일 출원된 M. M. Atalla의 출원 제13,688호에 개시되어 있다”는 문장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소자 자체는 선행 출원이 커버하고, 이 특허는 그 소자에 어떻게 바이어스를 걸어 쓸모 있는 특성을 뽑아내는지를 청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명자란에는 강대원 박사의 이름만 단독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청구항을 읽어보면 더 놀랍습니다. 총 6개 항, 모두 “In combination(조합에 있어서)“으로 시작하는 조합 청구항인데, 어디에도 ‘트랜지스터’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미국 특허분류도 323-94, 즉 ’전압 조정(voltage regulation)’입니다. 명세서는 이 소자의 용도를 담담하게 “전압 조정기, 그리고 전력 증폭”이라고만 설명합니다.


세상을 바꿀 소자가, 등록 당시에는 ‘전압 레귤레이터’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인용된 선행문헌은 단 한 건(US 2,918,628)뿐이었습니다. 그만큼 아무도 걷지 않은 땅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무자로서 눈여겨볼 지점이 또 있습니다. 우선일은 아탈라 출원일인 1960년 3월 8일로 잡혀 있고, 이를 기초로 네덜란드·독일(DE 1439921)·영국(GB 992003)·프랑스(FR 1293766)에 1961년 5월에 해외출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파리조약 우선기간 12개월을 마지막 주까지 쓴, 지금 보아도 교과서적인 타이밍입니다.


그런데 벨 연구소는 이 발명을 밀지 않았습니다


첫 MOSFET은 채널 길이가 20㎛에 달해, 당시 바이폴라 트랜지스터보다 약 100배 느렸습니다. 조직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아탈라는 계속되는 무관심에 지쳐 1962년 벨 연구소를 떠나 HP로 옮겼습니다.


그럼에도 기술은 밖으로 퍼졌습니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1956년 AT&T 반독점 동의판결(consent decree)입니다. 벨 시스템은 판결 이전 등록특허를 신청자에게 무상으로, 이후 특허는 합리적 실시료로 라이선스해야 했습니다. 인텔의 고든 무어는 훗날 “상업용 반도체 산업에 가장 중요했던 사건”으로 이 소송을 꼽았습니다.


그 결과 1963년 첫 공식 발표, 1964년 5월 제너럴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가 최초 상용화, 같은 해 10월 페어차일드가 뒤를 이었습니다. 1967년 벨 연구소가 자기정렬 실리콘 게이트를 개발했고, 그 계보는 1971년 인텔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US 3,102,230의 존속기간은 1980년 8월 27일에 만료되었습니다. MOS가 산업의 절대 주류로 올라서기 직전에, 특허는 이미 세상의 것이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1.3 × 10²²,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1960년부터 2018년까지 전 세계에서 제조된 MOSFET은 약 1.3 × 10²²개로 추정됩니다. 1 뒤에 0이 22개. 은하수의 별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전체 트랜지스터의 99.9% 이상이 MOSFET이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제조된 인공물입니다.


더 각별한 것은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강대원 박사는 1967년 시몬 스제(Simon Sze)와 함께 플로팅 게이트(floating gate)를 발명합니다. 발표 당시 벨 연구소 내부 평가는 “재미는 있으나 쓸모는 없다”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1971년 인텔이 이 구조로 최초의 상업용 EPROM을 만들었고, 그 계보가 EEPROM을 거쳐 오늘날의 NAND 플래시 메모리가 되었습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주력 제품이, 60년 전 한국인 박사의 아이디어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고국에서는 오래 잊혀졌던 이름


강대원 박사는 1988년 벨 연구소에서 퇴임한 뒤 NEC 연구소를 설립해 초대 소장을 맡았습니다. 1975년 프랭클린 연구소의 스튜어트 밸런타인 메달, 1986년 오하이오주립대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았고, 생전에 학술저서 3권, 논문 35편, 등록특허 22건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1992년 5월 13일, 외부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대동맥류 파열로 61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노벨상을 받았어야 할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늘 따라다녔지만, 노벨상은 고인에게 수여되지 않습니다.


2009년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디슨과 라이트 형제가 있는 그 명단)에 헌액되었고, 국내에서는 2017년부터 한국반도체학술대회가 ‘강대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습니다.


변리사로서 남는 세 가지 생각


첫째, 명세서는 그 시대의 언어로 쓰입니다. 이 특허의 청구항에는 ‘트랜지스터’가 없습니다. 발명자와 대리인은 자신들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그 순간에는 온전히 알 수 없었고, 알 수 있는 만큼만 썼습니다. 우리가 오늘 작성하는 명세서도 30년 뒤에는 그렇게 읽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청구항을 쓸 때 늘 “지금의 용도”보다 “구조 그 자체”를 붙잡으려 애씁니다.


둘째, 실험 데이터는 힘이 셉니다. 1200℃, 120분, 6 Ω·cm, 1000옹스트롬, 알루미늄 1500옹스트롬. 이 숫자들이 명세서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이 문서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재현 가능한 기술문헌으로 읽힙니다. 화학·바이오 분야 명세서를 쓸 때 실시예를 아끼지 말라고 늘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셋째, 특허가 늘 독점의 도구인 것은 아닙니다. 이 발명은 특허로 시장을 잠그는 대신, 반독점 판결이라는 우연을 만나 확산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특허는 전략입니다. 그리고 전략에는 ‘언제 열 것인가’도 포함됩니다.


다음 글 예고 — 세상을 바꾼 발명가들 ②


강대원 박사의 평면형 MOSFET은 미세화의 한계에 부딪히며 40여 년 만에 벽을 만납니다. 그 벽을 넘어선 것이 3차원 구조의 핀펫(FinFET)이었고, 그 원천 특허의 주인공 역시 한국인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종호 교수와 벌크 핀펫 특허, 그리고 인텔·삼성·TSMC가 모두 그 기술 위에 서게 된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원천특허 하나가 국가와 산업에 어떤 의미인지, 변리사의 시선으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큐리어스특허법률사무소 · 엄정한 변리사 shawn@QriusIP.com



0 0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면, 최신 트렌드와 각종 노하우가 담긴 소식지를 보내드립니다.

Subscribe

Mo. 010-2393-5709

Tel. 031-713-4803
kakao ID. eomtank

E-mail.

eomtank@gmail.coom

shawn@QuriusIP.com


Addr. Seongnam, Korea